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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 태국 이야기

여행박사 ceo 신창연의 무한 도전기!!!

여행박사 ceo 신창연의 무한 도전기!!!

3,000엔으로 일본에서 세 달 버티기

군에서 전역한 나는 스물다섯 넘은 나이에 다시 대입 공부를 시작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전문적인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아쉬움을 접을 수는 없었다. 늦은 나이라는 조건이 오히려 스스로를 채찍질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앞섰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단 하루도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지체 없이 독서실에 등록을 했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이를 악물고 공부에 집중했다. 청춘과 함께 숱한 밤들을 떠나보낸 대가는 내게 경원대학교 관광경영학과 입학이라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늦깎이 대학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밤에는 이태원에서 바텐더로 칵테일을 만들고, 낮에는 대학에서 다양한 지식과 이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느긋한 경험을 쌓으며 대학 문화에 익숙해질 즈음, 문득 ‘지금 나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찾고 있던 내 길을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두서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고민의 날들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기회를 잡아 부산으로 마산으로 광주로, 발길 닿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돈이 떨어지면 무작정 걷기도 하고, 아무 집이나 가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했다. 대부분 무전으로 떠났던 여행은 그 고생의 깊이만큼, 딱 그만큼 나를 성숙시켰다.
3학년이 되자 인생에 대한 고민은 더 깊고 넓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스포츠신문에 연재된 일본 무전 여행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국내도 아닌 외국으로 무전 여행을 떠난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집을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온 나로서는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무전 여행이라니, 신문의 한 면을 가로지르는 글귀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가는 거야! 까짓 거, 한번 해보는 거지 뭐!’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일본 여행을 가기로 했다. 물론 수중에 여행 자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준비라고 해봤자 주머니에 있던 돈 3,000엔(당시 한화로 1만 5,000원 정도)과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곳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전부였던 것이다.
“일본이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 하는 소리야? 3,000엔? 그 돈 갖고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걸, 아마…….”
교수님을 비롯해 선배와 친구들 모두 입을 모아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면 한 그릇도 250엔인데다, 거기에 숙박비와 차비까지 계산한다면 3,000엔으로는 정말 하루도 버티기 힘들 거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론에 의한 계산일뿐이었다. 그런 계산에 흔들릴 거라면 애초 무전 여행 따윈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낯설고 물선 모험 길을 함께 헤쳐 나갈 친구들을 모았다. 인생길이건 여행길이건 동반자가 있다는 건 무엇보다 큰 힘이 아니겠는가. 여행사에 취직한 선배들을 찾아가 여권도 만들고 비자도 받았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부터 작정했던 대로 여권을 받자마자 선배들에게 무조건 항공권을 협찬해달라고 졸랐다. 후배가 와서 조르니 안 줄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도 선배는 그동안 틈틈이 얼굴도장을 찍었던 후배를 예쁘게 보아 항공권을 선뜻 협찬해주었다.
결의에 찬 각오와 다짐을 손에 쥔 채 우리는 보란 듯이 나리타공항에 발을 디뎠다. 막상 일본에 도착하고 보니, 그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테이프를 들으며 공부해두었던 일본어는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지고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얘져 동전을 바꿔달라는 말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급한 마음이 앞서 “코인, 코인, 체인지!”라는 영어가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본적인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그저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바꾼 동전으로 일본에 살고 있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지만 신세를 진다’는 조건이었다. 너무도 당연했다. 아는 사람에게 빌붙어 관광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려고 일본에 온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선배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날부터 새벽같이 일어나 요코하마에 있는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드디어 이국에서의 처절한 생존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새벽 4시부터 인력시장에 나가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일할 사람들을 뽑아갔다. 그렇게 선택이 되면 이삿짐을 나르거나 소금을 나르는 등의 일을 했다. 주로 몸을 쓰는 단순노동이 대부분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열다섯 살 이후부터 50여 가지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단련시킨 체력 덕분에 그 정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현지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일본어도 배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여서 절로 신바람이 났다.
운이 없어 일을 못하게 된 날은 이를 기회 삼아 일본의 곳곳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어떻게든 좀더 많은 것을 보고 겪고 느끼는 것이 여행의 목적인만큼, 멀게는 후지산부터 가깝게는 근처 박물관 그리고 시골마을 등 제한 없이 장소를 정했다. 하루가 마치 한 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관광비자로 온 15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무비자로 단기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본 여행을 계획했더라도 따로 비자를 발급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당시엔 비자가 꼭 있어야 했고, 일본 체류 기한은 15일로 비자를 연장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같이 왔던 친구들은 대부분 브로커를 찾아갔다. 하지만 브로커에게 주어야 하는 돈이 만만치 않았고, 많은 돈을 주고 의뢰하더라도 비자를 연장하지 못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난 브로커에게 그 돈을 주느니 한국으로 들어가거나 차라리 직접 영사관으로 가서 담판을 짓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 일본에 온 지 고작 10여 일 남짓이었다. 그동안 일본어가 늘었으면 얼마나 늘었으랴만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체류 기한을 이틀 앞두고 영사관에 갔다.
“난 일본에 여행 온 학생입니다. 처음엔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잠깐 여행만 하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일본에 와서 느낀 점이 참 많습니다. 일본에 와서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좀더 머무르고 싶습니다. 아마 저는 앞으로 일본 문화를 알리고, 일본과 한국의 교류를 넓힐 다리가 될 것입니다. 저를 믿어보십시오. 지금은 비록 학생이지만 전 곧 일본을 위한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되지도 않는 일본어로 열변을 토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영사관 사람들은 내 말에 동의하며 군소리 없이 체류 기간을 연장해주었다.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뜨거운 열정과 진심이 통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래도 세 번 이상은 연장이 안 되는 게 법으로 명시되어 있어서 나는 잠시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식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장장 3개월이라는 기간을 일본에서 보낼 수 있었다.
일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막노동으로 몸은 더없이 힘들고 지쳤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투명했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모두 벗어버린 것만 같은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혼란스럽기만 하던 머릿속이 신기하리만치 깨끗하?께 따를 때 결과도 있는 법이다. 실패든 성공이든, 결과를 얻고 싶다면 반드시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일본의 비싼 인건비 덕에 3개월 동안 번 돈의 액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여행에서 얻은 귀중한 경험과 남은 학기의 등록금, 거기다 꿈에 그리던 최신형 야마하 전축까지 손에 쥔 나는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귀국했다.
집을 떠나면 누구나 힘들게 마련이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집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은 내 몸을 움직여야만,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가면 물갈이를 하기도 하고, 잠을 설치기도 하는 이유는 바로 여행이 주는 불편함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여행은 상처 입은 과거를 치유하는 힘과 불투명한 미래를 밝히는 힘, 그리고 그 어떤 일도 헤쳐 나갈 수 있게 하는 자신감까지 함께 심어준다. 여행은 진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광만으로 그 목적을 다하지 않는다. 이런 확고한 믿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 가슴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문제는 돈이다. 가난한 고학생인 나에게 여행은 사치이자, 모험이었다. 대부분 해외여행은 비쌌고, 돈이 있는 사람들만 가거나 부모님 효도관광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난 돈 없는 사람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적은 비용으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삶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여행을 보다 저렴하게 할 수는 없을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던 것 같다.
‘여행박사’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업계의 이마트’라고 떠올린다. 이마트처럼 중간 유통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해 원가를 절감해서 저가여행상품을 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저가여행상품은 여행박사가 다른 여행사들과 철저하게 차별되는 부분인 동시에 경쟁력의 원천이고 또 여행박사가 고객들에게 줄 수 있는 최우선의 혜택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행박사’를 창업하면서 대학시절의 경험을 되살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고객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그런 ‘저가여행상품’을 만드는 데에 주력했다.
“기존 여행사 상품보다 더 싸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고객들로 하여금 만족을 불러일으키려면? 답은 하나야. 불필요한 비용을 없애 최고의 상품을 만드는 거야!”
직원들은 너나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기존 여행사와 달리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야 더 저렴한 여행상품이 나올 수 있을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고, 다른 대부분의 여행사들이 하는 것과 차별화를 둔다는 말의 의미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몇날 며칠, 직원들에게 저가여행상품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이마트’를 예로 들며 중간 유통 과정을 생략하고 모든 것을 현지와 직접 거래하는 방식을 도입했을 때 얼마나 경비가 줄어드는지, 여행사 경비 중 가장 많이 들어가는 광고를 과감하게 생략하면 또 얼마나 절감되는지를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감소한 비용만큼 고객들에게 저렴한 여행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설명의 요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의 얼굴에서 의심과 불안의 빛이 사라지고 점점 확신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해외여행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 위즈덤하우스 『열정이 있다면 무모한 도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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